[3.1절 100주년 기념 특집기획] 하와이 ‘길’ 이름 속에서 이민선조들의 발자취를 찾는다

이덕희 하와이 이민사연구원

데미안 신부가 타계한 후 덧턴 신부는 수백 명의 나병환자들을 돌보아 주다가 1931년에 88세를 일기로 칼라우파파에서 세상을 떠났다.  

덧턴 신부가 돌보아 준 환자들 중에는 낯설고 물선 하와이에 와서 고생을 하던 한인들도 있었다. 
 1906년 하와이 영토 보건국 연보에 1명의 한국인 환자가 있다는 것이 보고 되어 있다. 
 칼라우파파 나병수용소에 환자들이 처음 입소한 지 꼭 40년이 지나면서 한인 환자가 들어온 것이다. 1917년에는 10명의 한인 환자가 있었다. 
 1917년 5월 30일에 30세의 나이로 사망한 김씨의 사망진단서에는 죽음의 원인이 ‘신부전증’이라고 했고, ‘미친 증세’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4년 17살 때 하와이에 온 청년 김씨는 여러 사탕수수농장을 거쳐 하와이 섬 코나지역에서 결혼한 후 커피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중 1915년에 나병환자로 판명되었다. 
 나병은 자동적으로 이혼의 원인이었음으로 이혼한 청년 김씨가 칼라우파파에 갇혀 있으면서 육체적 병보다는 외로워 미쳐 죽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1923년에는 한인 환자수가 15명으로 늘어났다. 
 1925년 6월 19일에 입소한 54세의 한인 1명은 그해 10월 24일에 익사했다. 당시의 익사는 자살이었다. 
 칼라우파파 수용소로 강제 수용되기 전에 고국으로 돌아간 한인 환자도 있었다.  
 1909년 2월 12일에 한 환자가 자진 귀국하였다는 기사가 『신한국보』에 실렸다. 참고로 한국의 나병환자촌은 1916년 일본에 의하여 소록도에 세워졌다.
 한편, 칼라우파파 수용소에 환자가 아닌 한인들이 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한인들이 이곳에 직장을 갖고 살기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 월말 보고서에 한인 2명이 요리사직에, 또 1명은 일반 노무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음이 적혀있다. 1953년에는 이 수용소에 한인 의사가 주치의로 들어왔다. 
 1953년 9월 18일자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지는 보건국이 김유택 박사를 나병환자 주치의로 임명하였다고 보도했다. 
 “한국 출생의 미국 시민 김 박사는 1905년에 부모와 함께 이민 왔으며, 중학교부터 본토에서 공부하고, 1919년에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에모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스톤 시립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뉴욕 이티카 홱스톤 병원과 버팔로의 뉴욕 결핵병원에서 특별훈련을 받았다. 
 그 후 하와이로 돌아와 지난 27년 동안 일반진료를 보았다. 
 김 박사는 의학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나병에 관심을 가졌으며, 전 칼리히 나병환자 입원소를 자주 드나들었다. 김 박사는 일반진료를 보면서 특히 피부병 환자를 많이 받았다.”라고 김 박사를 소개하였다.
   초기 이민자들 중 신체적 또는 정신적 질병으로 병원이나 환자촌에서 고립된 생활을 유지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인 나병환자 수가 15명 (모두가 남자)이었던 1923년에 하와이의 총 나병환자수는 472명이었으니, 전체 환자의 3%가 한인환자이었던 셈이다. 
 한인 공무원들이 칼라우파파 나병 환자촌에서 일을 했고, 더구나 한인 주치의가 다민족 나병환자들을 보살폈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하와이 한인 이민사의 한 토막이다.  [미주한인재단 하와이/건국대통령 우남 숭모회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