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김치의 날 제정 특집] 김치산업의 원조 하와이 김치시장 변화

1900년대 하와이 김치시장

1) 1915년에 도착한 사진신부 김소천은 1930년도부터 남편 김진화 (1905년 이민)와 호놀룰루 칼리히 (Kalihi)지역에서 배추농사를 하여 도매상에 넘기는 이른바 ‘truck farmer’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내린 우박으로 배추잎에 구멍이 뚤려 팔 수 없게 되었다.

걱정하고 있는 김소천에게 아들 Joe (Joseph)가 “엄마가 잘 만드는 김치를 만들어 팔면 되지 않아?”라고 했다.

김진화 부부는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큰 (gallon size)병에 김치를 담아 50센트씩에 파는 일종의 도매장사를 하였다.

장사가 제법 잘 되어 1938년부터 조그만 병에 넣어 식료품 가게에 납품하고 싶었다.

상표가 필요했는데, Joe의 친구가 마름모꼴 안에 “ K” 를 넣은 로고를 만들어 주었다.

마름모 꼴의 4면은 네 개의 k, 즉 김치 k, 코리안 k, 칼리히 k, 김씨 k 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첫 김치 상표 < 다이몬 K> 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김치 장사는 한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현지인을 상대로 했기에, 국민보에 광고를 실은 적이 없다.

1947년 아들 조(Joe)가 사업을 물려 받으며 1947년 1월 15일부터 1952년 1월 2일까지 5년동안 매주일 국민보에 상표 광고를 실었다.

상표에 병 크기가 quart 임이 밝혀 있다. 한인 고객을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한인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밝히려는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1954년에 상표를 Joe Kim’s Kimchee로 바꾸었는데, 새 상표로 된 광고는 국민보에서 찾을 수 없다.

1954년 12월 15일자 국민보 기사에서 Joe Kim’s김치가 대륙 (미주 본토)과 괌과 사이팬으로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하와이의 5, 6개의 김치회사 중 Joe Kim’s 가 가장 크며, 매일 2,150 ~ 3,750파운드의 김치를 생산하였다.

매 주일 3,000파운드를 뉴욕으로 수출하고, 매달 3,000 파운드를 괌과 사이팬으로 수출하였다 (12월 24일자 태평양주보에도 유사한 기사가 실렸는데, 무게를 파운드 대신 “근”이라고 하였음).

1980년에 Joe 의 아들 Richard 가 물려받아 3세대로 이어진 김치기업이 되었다.

2) 1942년 4월 1일부터 국민보에 “상표 떠불유 씨를 삼각형 안에 쓴 것”이라는 설명 문구의 김치 광고가 실렸다.

사장은 김명식이며 주소는 North Kukui St. 163번지 (전 해동여관 하층) 라고 밝혔다.

“만드는 사람이 으러버 (러버=고무)장갑을 끼고” 만들어 위생적임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1942년 11월 25일자 광고에는 ‘조기젓으로 김치를 담아”라는 문구가 실린 것으로 미루어 한인들을 상대로 한 김치 사업이었다고 추정한다.

1943년 6월 2일자 광고가 마지막인 것으로 미루어, 더 이상 운영되지 않은 것 같다.

사장 김명식은 20살, 미혼으로1904년 12월 24일에 이민 왔는데, 그에 관하여는 신문 기사도 찾을 수 없고 알려진 것이 전혀없다. (같은 이름의 다른 김명식이 1903년 12월 28일에 홀아비로 서울에서 왔는데, 1919년 11월에 일본 여권을 발급받아 환국하였다.)

3) 1949년에 하와이섬 코할라 (Kohala)에서 김순내 (Hannah Kim Liu)가 김치 장사를 시작했다.

김순내 (1904년5살에 부모와 이민)의 남편 (Fa Sing Liu 중국계)이 코할라 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어 새로 이사한 지역이었다.

이웃들과 친해지기 위해 동네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갓 (mustard cabbage)으로 맵지않은(mild) 김치를 만들어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이 김치가 맛있다고 계속 원했다.

그래서 갓 이외에 오이와 배추로도 김치를 만들어 Kohala Kim Chee라는 상표로 팔기 시작하였다. 물론 모두 맵지않게 만들었다.

1950년대에는 호놀룰루의 Nishimoto Trading Company를 통하여 시카고와 미네아폴리스에까지 김치를 수출하였다 (2001년 4월 8일, 아들 Donald Liu와의 인터뷰).

김순내가 고집한 “세계 시장을 위해 맵지 않게! Mild taste for international market” 이 통하였다. 1965년에 이르러는 매일 500 파운드의 김치를 만들어 호놀룰루 마켓에도 공급하였다.

1965년부터는 교편에서 은퇴한 남편이 맡아서 운영하다가, 1975년에 아들 Donald Liu 부부가 이어 받았다.

어머니의 방식대로 완전히 손으로 자르고, 버무르고, 병에 담는 수작업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미주 본토에 급증한 새 이민들도 김치를 만들어 팔기시작하면서 김치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1999년 4월 15일에 한인 3세 마이크 아이리쉬 (Michael Irish)에게 회사를 매각하였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