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기념 특집기획] 하와이 ‘길’ 이름 속에서 이민선조들의 발자취를 찾는다

하와이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마노아 (Manoa)는 ‘넓은’, ‘광활한’ 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주택으로 꽉 차 있어서 가까이에서는 이 지역이 넓은 안골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나 와이키키 지역 고층 건물에서 바라보면, 코올라우 (Koolau) 산맥을 배경으로 한 이 지역이 정말 넓은 골짜기임을 알 수 있다. 넓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와이의 3대 농작물 재배가 시작되었다. 
 1815년 경 영국인 윌킨슨 (John Wilkinson)이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가져 온 커피나무를 심어 커피재배를 시작하였고, 1825년에는 당시 오아후 섬의 통치자 보키 (Boki)가 윌킨슨과 합자하여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하고 또 파인애플도 재배하였다. 

1826년 윌킨슨이 갑자기 사망하자 보키는 서서히 농작물 재배에 흥미를 잃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의 피해가 컸고 결국 농장은 폐쇄되었다. 
 1828년에 러글스 (Samuel Ruggles) 목사가 마노아에서 받은 커피씨를 하와이 섬의 코나 (Kona) 지역에 가져가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수십 년간 여러 서양인 농장주들은 경제타산이 맞지 않는 실패를 거듭하였다. 
 드디어 1898년에 땅을 5 에이커씩 나누어 일본인들에게 분양함으로써, 지금의 유명한 코나 커피의 자작농 기틀이 잡혀졌다. 곧이어 일본인들에 의해 코나 커피 공장이 세워졌다. 
 1905년 이후 한인 이민자들도 사탕수수 농장에서 나와, 코나 지역에서 커피 소작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코나 지역에 있는 570여개의 커피농원 중 텍사스 출신의 김창학대표가 운영하는 코나 헤이븐 농장과 통일교가 운영하는 퀸스커피 농장이 한국에 코나커피에 대한 명성을 알리고 있다.  
 하와이대학교 (주립)는 1908년에 농과 기술학교인 College of Hawaii로 시작되었다. 4명의 학생과 3명의 강사가 있었고 농업, 엔지니어링과 유사한 기술학과를 가르쳤다. 
 당시 국민보는 하와이대학교를 ‘농림대학’이라 불렀으며, 1913년에 오용운이 이 농림대학에 입학한 첫 한인 학생으로 1918년에 졸업하였다. 
 오용운은 영어 이름을 Cloud Owen으로 썼으며, 1925년에 와히아와에서 Korean American Club을 조직하였는데, 이 클럽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오용운이 졸업한 그 해 말에 중국태생의 윌리암 얍이 하와이대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단과대학을 종합대학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438명의 하와이 사회 유지들의 서명을 받아 하와이 의회에 그 계획서를 상정하여, 그 안이 1919년 4월 30일에 채택됨으로써 1920년 9월 학기부터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종합대학으로 시작된 첫 학기에 등록한 한인 학생은 Millis 고등학교 (현 미드 팩 학교)를 졸업한 서기문이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은 10명 미만의 한인 학생들이 등록하였는데 1930년부터는 20-30명의 한인 학생이 있었다. 

1930년에 한인 학생들이 한국어, 한국역사, 한국문화 강의를 개설해 달라고 하와이대학교 크로퍼드 (David L. Crawford) 총장에게 청원하였다.  대학 당국은 5명으로 구성된 한인위원회를 결성하여 실황조사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국학 관련 강좌가 하나도 개설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한인위원회가 한국학 강좌를 들을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인지한 것 같다.
 그로부터 42년 후인 1972년에 한국학연구소가 창설되었고, 1980년 3월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학 구내에 전통 한국식 연구소 건물을 개관하였다.
 사진 아래 본관(오른쪽)은 경복궁의 근정전을, 별관은 향원정을 모델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