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김치의 날 제정 특집] 김치산업의 원조 하와이 김치시장 변화

2013년에 유네스코가 김치를 인류무형문화 유산으로 인정하였다.

2020년에 한국정부는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정하였다.

올해 하와이주도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정하여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하와이가 김치 (산업)상업의 원조임을 밝힌다.

여기에 실리는 글은 2023년 10월 27일 인하대학교에서 열린 <재외한인학회.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 공동국제학술회의>에서 “ 하와이 초기 이민의 김치 산업”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약간 줄인 것임을 밝힌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I. 서론
미국의 1965년 새 이민법 실행으로 1968년에 하와이에 “새 이민” 한인 91명이 도착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1975년까지 총 6,315명이 왔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 하와이주 전체에 살고 있던 한국 출생 “초기 이민” 한인은 700여명 정도였다.

새 이민자들은 호놀룰루의 식료품점 (마트)에 진열된 여러 상표의 김치병들을 보고 놀랐다.

1980년대 초 하와이의 고급 대형 호텔 부페에 김치가 포함되기 시작하였을 때 새 이민자들은 의아해 하였다.

아직 김치가 미국인의 혐오 음식으로 홀대받고 있었고, 외출할 때는 김치를 먹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였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김치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 한인사회는 1903년 1월 13일에 도착한 “초기 이민”102명으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황제가 공식적으로 미국 영토 하와이 이민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905년 8월까지 약 7,500명 (619명 부인과 161명 아이들 포함)이 왔고, 대한제국은 이민을 금지했다.

이들은 당시 하와이에 있던 59개 사탕수수농장 중 36개의 농장에서 일하며 살았다.

1910년까지 2,280 명 (남 1,959, 여 157, 아이 164)이 환국하였고, 약 800명은 미주 본토로 이사하였다.

191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하와이에 한인 4,533명 (하와이 출생 362명 포함)이 살고 있었다.

한일병합 후1910년 말부터 한인들이 일본 여권을 가지고 하와이에 오기 시작하였다.

1924년 동양인 배척령 (Oriental Exclusion Act)으로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이민이 중지될 때까지 약 860명이 왔는데, 약700명의 “사진신부”와 초기 이민자들이 두고 왔던 식구들이었다.

1950년에는 한국출생 1,700여명을 포함한 7,000명의 한인이 있었다.

대한인들이 사탕수수농장에 도착하였을 때 사탕수수농장회사들은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을 민족별로 한인 캠프, 일본인 캠프, 폴투갈인 캠프 등 동네로 나누어 살도록 하였다.

대한인 이민 이전, 1852년 부터 중국인, 1885년에는 일본인, 1887년에는 폴투갈인들이 계약 이민으로 오기 시작하여, 1903년 대한인이 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여러민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여러 민족 이민과 함께 많은 새로운 채소와 과일 등이 하와이로 유입되어 재배되고 있었다.

더구나 농장마을 집 옆에는 텃 밭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원하는 채소를 심어 먹을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배추 (하와이에서는 원복 wonbok 이라고 부름), 무, 완두콩, 가지, 단호박, 양파, 생강 등을 길렀다.

한인들도 손쉽게 이런 채소를 기를수 있어 고향의 음식을 비슷하게나마 해 먹을 수 있었다.

여러 민족 노동자들이 이웃한 다른 민족 노동자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소통을 할 수 없었지만, 각 민족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리며 놀면서 자연스럽게 그 집 음식을 맛보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김치, 폴투갈식 국, 일본 주먹밥 등을 얻어 먹으면서, 어른들도 자연스럽게 각 나라 음식을 나누어 먹게 되었다. 음식은 언어가 필요없이 나누어 먹을 수 있어 가장 먼저 보급되는 문화 형태이기 때문이다.

다민족, 다문화 하와이에서 한인은 총 인구의 2%정도를 유지한 소수 민족이었다.

어떻게 소수 민족 한인의 김치가 하와이 사람들에게 보급되었을까?

김치 상업을 통해서였다면, 언제부터 하와이에서 김치가 상업화 되었는지 추적해 본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