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새 이민 한인 1세대 `나는 역사다’
하와이 주립대학은 해외 대학 중 가장 큰 규모의 한국어 프로그램을 자랑하고 있다.
1972년부터 하와이 대학에서 한국어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영어권 사회에서 활동하는 가장 많은 한국어 교사 및 연구자들을 배출시켜 해외 한국어 보급과 연구의 대부로 알려진 손호민 박사와 인터뷰했다.
다음은 손호민 박사와 서면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 정리: 이재선 편찬위원>
어떻게 한국에서 하와이로 오게 됐나?
나는 1933년 순천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1952년 서울대학에 입학했을 때 당시 젊은이 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정치학과에 지원했었는데 합격 통지서에는 언어학과로 기재되어 있었다.
알아 보니 서울대 합격권에는 들었으나 정치학과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당시 언어학 학과장의 요청으로 내가 언어학과에 배당되었다고 했다.
다른 학과로 전과를 원하면 재학 일년 후에 옮길 수 있다고 했지만, 일단 언어학을 시작하니 전과할 생각이 없어졌다.
서울대학에서 언어학 학사(1956)와 석사(1965) 학위를 받았는데, 학사를 마친 후 문교부 차관 비서를 거쳐 UN 한국사업단 한국정부 대표의 보좌직에 있으면서 덕성여자대학에서 영어 시간 강사를 하고 있었던 1964년, “하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 장학생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일체의 학비와 체류 비용을 부담해주는 이 장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해서 1965년 여름 동서문화센터 장학생으로 하와이 대학 언어학 석사 과정에 입학하고1969년 6월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귀국해서 동국대학 언어학/영어학 조교수로2년간 일하던 중 하와이 대학에서 만났던 지도교수가 태평양 지역 작은 섬들의 언어를 연구하는 조교수급 연구원으로 나를 초대했다.
미국에서 좀 더 나은 삶과 자녀 교육을 하기 위해 나는 이 초대를 받아들여 다시 하와이 대학과 연을 잇게 됐다.
어떻게 하와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됐나?
1972년 하와이대학에서 미국에서 처음으로 한국학 연구소(Center for Korean Studies)가 설립되었고 그와 동시에 동아시아 언어학과에서 한국어 조교수 한 명을 뽑았다.
한국어가 한국학의 기초이기 때문에 한국학 연구소 강화를 위해 학교측이 한국어 교수를 채용했다고 생각한다.
상당한 경쟁을 뚫고 다행히 내가 채용되어 동아시아 언어학과에서 한국어 강의와 연구를 시작했다.
하와이 대학은 언제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한국어 프로그램은 어떻게 발전했나?
하와이 대학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1946년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건축가였던 박관두 씨를 시간 강사로 채용하여 기초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1946년 가을 학기에 학생 10명이 등록했고, 이듬해 봄학기에는 6명이 등록했다.
그 후 한국어 과목을 수준별로 달리 해서 모두 세 과목을 가르쳤다.
박관두 씨는 1951년까지 가르쳤는데, 1952년부터 1961년까지는 누가 가르쳤는지 기록은 없으나 수업은 계속되었다.
1961-62년에는 K. Kim이라는 시간강사가 가르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62년에 한국문학을 전공한 Peter Lee박사가 한국어 조교수로 채용된 후 한국문학 과목을 신설하고 문학을 가르쳤다.
언어쪽은 시간 강사나 객원 교수들이 한국에서 와서 1년씩 가르치다 한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한국어와 한국문학 과목의 총 등록 학생 수는 고작해야 연간20명에서 50명 사이였다.
한국어 과목에 등록하는 학생 수도 많지 않았지만 하와이대학은 1968년 이동재 선생을 한국언어 쪽 전임강사로 채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에 내가 한국어학 조교수로 채용되었고 그 뒤로는 객원 교수에 의존한 강의는 없어졌다.
하와이 대학에 일본어나 중국어는 이미 1942년에 학사 과정이 개설되었고, 1968년에 일본어문학 석사와 중국어문학 석사 과정이 생겼고, 1969년에는 일본 문학 박사 과정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한국어는 학위 과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그냥 언어 학습만을 위해 수강했다.
한국어 학위 과정이 있으면 전공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하지만 한국어는 학생들의 개인적인 선택으로 수강했기 때문에 한국어 프로그램이 풍전등화처럼 불안정했다.
1983년부터 한국어 학사 과정을 설치하려고 대학 당국에 신청했으나 수강생 미달을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다 1987년에 석사, 박사 과정을 먼저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동아시아 어문학과 학과장이었던 1995년에서야 한국어 학사 과정도 설치되어 비로소 명실공히 한국어문학도 일본어문학, 중국어문학과 함께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갖추게 되었다.
초기 하와이 대학 한국어 수업에 등록한 학생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나?
한국어 수업이 처음 시작된 1946년부터 1980년 경까지는 미국인 일반에게는 한국이 과거 일본 식민지였고 가난한 나라였고 6.25를 겪은 피폐한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반 학생들은 외국어로 일본어나 중국어를 선택하고 한국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처음 하와이대학에 취직했던 1972년 가을과 1973년 봄의 1년간 한국어 수강생 수는 모두 26명이었는데, 당시 일본어 수강생은 2,739명이고 중국어는 774명이었다.
우리는 1 년간 26명의 학생을 두 전임 교수가 가르친 것이다.
처음 내가 가르친 수업(2, 3 학년급)의 학생들은 한국 이민 자녀가 2, 3명 있었고 한국인 부인과 국제결혼한 미국 남자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그리고 한국에 평화 봉사단으로 갔다 온 학생들 등이었다.
아마 기초반에는 더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을 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한국어 수강생은 이런 학생들이었고, 거기에 이미 일본어나 중국어에 능통한 학생들이나 기타 소수의 학생들이 호기심에서 한국어를 수강했다.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한국어의 인기가 아주 낮았고 수강생 수가 극히 저조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어 프로그램이 있는 몇 안 되는 다른 미국의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와이 대학이 한국어 부문에서 해외에서 손꼽힐 정도로 발전한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 대학의 한국어 교육은 1980 년대 말까지 30 개 가량의 대학에서 실시되었다.
그 후 그 수가 대폭 증가하여 2001 년에는 120 개 가량의 크고 작은 미국 대학에서 매 학기 총 5,000 명 내외의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2022년 9월)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어를 가르치는 대학 수가 다소 더 늘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많은 대학 중에서 하와이 대학(UHM)과 UCLA는 연간 한국어 수업 등록생 수가 1,000명 가량 되는 대규모 프로그램이다.
미국 대학의 한국어 교육은 한국의 국력과 재미교포 인구의 증가에 비례해서 발전해 왔다.
한류를 포함한 한국의 국력 신장은 모든 대학에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한인 인구의 경우는 지역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학마다 수강생 수에 큰 차이가 난다.
대체로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있는 대학이 한국어 수강생이 많은 경향이 있다.
한국 외교부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내 한인 인구 1위인 지역에 있는 UCLA는 한국어 프로그램 수강생 수가 그에 비례하지만, 하와이 대학의 경우 한인 인구가 LA의 10분의 1에 불과한데도 수강생 수가 UCLA와 비슷하고 미 전국적으로 공동1위를 기록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하와이 대학과 UCLA만 미국에서 한국어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이 있다.
게다가 하와이 대학은 한국어 정규 과정 외에 미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은 한국어 플래그십 프로그램의 학사, 석사 과정도 있어서 미본토에서 많은 학생들이 하와이로 온다.
UCLA처럼 미국의 다른 유명 대학에서 한국어 프로그램은 많아야 교수직이 한 명이거나 전임 강사들만 있는데 비해 하와이 대학은 교수직이 현재 4명, 전임강사 3명이 있고, 많은 조교와 시간 강사들이 있다.
그리고 하와이 대학은 학사부터 박사까지 한국어 교과 과정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에 따라 하와이 대학은 해외에서 가장 많은(40여명) 한국어 박사를 배출했고, 이들이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한국어 교수나 전임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손호민 교수가 해외 한국어 확산에 기여한 부분은 무엇인가?
내가 한국어 확산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첫째로 하와이 대학에서 한국어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신설하는데 주역이 되어 많은 한국어 교육자들을 양성했다.
둘째는 내가 주관해서 1994년부터 영어권 대학용 한국어 교재를 초급에서 최상급까지 총 28 권을 개발했고,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이 교재들을 하와이대학에서 출판했다.
이 교재는 전세계 영어권 대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한국어 교재로 보급되었다.
셋째는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하와이대학 한국어 플래그십 센터의 디렉터로 8년간 일하며 미국인으로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어 전문가들을 많이 양성했다.
넷째로 미국의 한국어교육자 협회(AATK: American Association of Teachers of Korean)를1994년에 창설하고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어 교육을 지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로서 평생 한국어에 대한 다양한 주제로 약 120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출판했고, 단행본도 20여권 출판했다.
이민자로서 남기고 싶은 말은?
성공한 이민자가 되려면 영어 외에 적어도 한 가지 분야에서 철저히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분야가 어떤 분야이든 본인이 선호하는 분야에서 전문적인 실력을 길러야 한다.
일단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기회는 자연히 찾아 오게 마련이다.
물실호기,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고 붙들어서 성실히 그리고 꾸준히 맡은 일을 수행하다 보면 결국 성공한 이민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리 저리 분야를 너무 바꾸지 않고 선택한 분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깊이 파고, 여기에 원활한 대인 관계는 필수 요건이다. 인간 사회에서 인화가 만사라고 믿는다. 교육자라면 선배나 동료,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정직, 겸손, 친화, 협조, 배려, 희생 등 인화적 요소를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무엇보다도 내 지도 교수와의 돈독한 인간 관계 때문에 나는 하와이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동료들, 학생들과의 두터운 인간 관계 때문에 은퇴할 때까지 순탄하고 생산적인 학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