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문제
지금과는 달리 새 이민이 시작되었을 때는 청소년 문제도 많이 있었다.
그야말로, 아침 신문을 볼 때마다 또 어떤 사건을 저질렀을까 조마조마할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로 바쁜 가운데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적응이 어려운 사춘기의 아이들을 돌볼 여유도, 또 돌보아야 할 필요성도 깨닫지 못했을 때였다.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깡패같은 조직을 만들어 범죄행위를 일으키는 청소년들도 많았다.
청소년들을 도우려고 1981년 2월에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와 한인기독교협의회 (1977년 9월 조직) 공동으로 한인 청소년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미비하나마 활동을 이어 오다가 1983년 11월에 재정문제 등을 재 정비하고 청소년후원회를 발족하였다.
2년 반 동안 운영해오면서 재정 정비의 필요성도 알게 되었고, 또 뚜렷한 목표 정립도 필요했다.
청소년을 선도하여 착실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후원한다는 취지로 회장에 최영호, 이사장에 채경석 (후에 이덕희)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청소년 프로그램을 이끌어 갈 지도자가 없었다.
결국 호놀루루 YMCA와 협력하여 운영하기로 하였다.
1984년 9월에 칼리히 YMCA에 한인청소년 프로그램 (Korean Youth Program, KYP) 을 설치하고 활동하였다.
KYP 활동이 성공적으로 이어가자, 1987년 9월에 YMCA는 이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를 계기로 1988년 2월 2일에 스타 블르틴은 고문 편집인 스마이서 (A. A. Smyser) 의 글 “Y (MCA)가 어떻게 하와이의 지도자를 양성했나?” 를 실었다.
스마이서는 코리안 바 사건이 있었을때 스타 블르틴이 사과하도록 한 대표 편집인이었다.
스마이서는 중국계 미국인 하이람 퐁 (Hiram Fong)과 일본계 미국인 대니엘 이노우에 (Daniel Inouye) 상원의원이 모두 YMCA 프로그램을 통하여 자라났음을 상기시키며, 앞으로 한국계 미국인 상원의원이 나올 것이라며 글을 시작했다.
요점은 칼리히YMCA의 한인청소년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곧 한인계 상원의원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덧붙여, 1918년에 중국인, 일본인, 한인 YMCA를 통합하여 누우아누 YMCA를 창설하면서 민족 갈등 등으로 어려움이 있었을 때 이승만 박사가 중국인 대표 C.K. Ai (City Mill 창립자)와 일본인 대표 Iga Mori (의사) 와 함께 협력하였기에 가능하였음도 상기시켰다.
(이승만과 몇명 이사의 사진이 누우아누YMCA 회의실에 걸려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맥킨리, 루즈벨트, 카이무키, 모아날루아, 미드 팩 고등학교에 한인 클럽이 조직되었다.
각 클럽 회장과 임원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매년 사업계획을 작성하고 실천하였다.
이 프로그램 출신 대학생들이 지도와 도움을 주었으나, 클럽 자체는 고등학교 학생 회원이 전적으로 운영하였다.
클럽 회원들은 고등학교 대항배구, 농구, 축구, 볼링 게임을 주관하였고, 장기시범 대회, 대학진학 세미나, 연말연시 파티, 경로 잔치 (알라모아나 공원에서) , 미국 선거운동 동참 운동 (선거인 등록, 투표 안내 등) 등도 이어갔다.
결과로, 한인청소년의 사회적 문제가 격감되고, 청소년들이 사회활동에 동참하는 의식이 육성되었다.
무엇보다 자치적인 조직활동을 통해 장래 지도자가 양성되고 있었다.
학생들의 활동을 위해 한인사회가 적극적으로 후원금을 희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와이 주 부지사 등 정계 인사들도 후원하였다.
1993년 12월에 YMCA의 예산 삭감으로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던 한인 청소년 프로그램을 필리핀, 사모아 등 다른 소수민족들과 합친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인 학생들이 합동프로그램을 원치 않고,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기를 원하였다.
1994년 1월에 YMCA 에서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새로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인 학생들이 더 이상 이런 프로그램이 없어도 잘 적응하는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자연적으로 끝났다. 성공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