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기념 특집기획] 하와이 ‘길’ 이름 속에서 이민선조들의 발자취를 찾는다

데미안 (Damien) 신부가 나병환자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자신이 나병에 전염되어 사망한 곳으로 잘 알려진 칼라우파파 (Kalaupapa: ‘납작한 평야’ 혹은 ‘납작한 잎’)는 몰로카이 섬 중앙부 북쪽에 위치한 13평방 마일 (와이키키는 1 평방 마일 지역)의 평야이다.  몰로카이 중심지와 해발의 차이는 100 피트 내지 3,000 피트 (10 피트는 보통 한 층의 건물 높이)가 나는 낭떠러지 바닥으로, 당나귀 이외의 육로 교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1800년대 초기에 약 3,000명의 하와이 원주민이 칼라우파파에 살았다. 땅이 비옥하여 고구마 재배가 성하였고, 고구마 순을 사료로 쓰면서 돼지를 길러 양돈(養豚) 산업으로도 유명하였다.  1849년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금광 호황시기)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배들이 와서 고구마와 돼지를 물물 교환해 갔다.  하와이 왕국에 나병 전염이 문제로 대두된 것은 1865년이다.  그래서 카메하메하 5세 왕은 “나병 전염 금지법”을 선포하였고, 칼라우파파를 나병환자 수용소로 지정하였다.  나병환자를 실은 첫 배가 1866년에 이 곳에 도착하였는데, 의사도 간호사도 없고 또 잘 곳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때부터 나병환자들은 칼라우파파에서 “떨어져 살아야하는 병”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곳에 살면서 고구마 농사와 고기잡이 생활을 이어간 원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아니면, 마지못해 왕국 정부에 땅을 팔고 “윗동네” (“Top Side” 벼랑 꼭대기에 있는 마을을 지칭)로 이사 갔다.  그래도 몇몇 집은 남아 있다가 1895년에 강제로 축출당하여, 환자가 아닌 하와이 원주민들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칼라우파파 수용소에서 벨기에 출신인 데미안 신부가 33세의 나이로 1873년 4월부터 자원하여 700여명이나 되는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손수 교회를 짓고 환자들과 같이 예배와 기도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밤 낮없이 환자들을 목욕시키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이렇게 환자들을 돌보아주던 데미안 신부는 12년 후인 1885년에 나병에 감염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치료방법도 없고, 또 일손도 모자라는 수용소에서 데미안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뿐이었다.  다음 해에 미국 버몬트 주 출생의 덧턴 (Joseph Dutton) 신부가 칼라우파파에 도착하여 데미안 신부를 도우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데미안 신부가 1889년 4월 15일에 49년의 삶을 마칠 때 까지 덧턴 신부는 동료로 또 친동생처럼 데미안과 지냈다.   참고로, 1200년대부터 노르웨이에는 나병전문 병원과 수용소가 있을 정도로 나병 감염이 심했다.  1873년에 그곳에서 제랄드 한센(Gerald Hansen)박사가 나병균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한센 박사가 나병균을 찾아 낸 후부터 나병을 한센병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그저 문둥병이라 했고, 영어로 leprosy 혹은 Lazzaro 즉 Lazarus 병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시몬이라는 문둥병 환자를 고친 일이 나자로 (Lazarus)의 집에서 있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주에 계속> [미주한인재단 하와이/건국대통령 우남 숭모회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