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특별한’ 유물이 관람객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주인공은 오랜 시간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아래에 묻혀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온 향로.
전시 기간은 2주가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 막 보존 처리를 끝낸 이 향로를 보기 위해 국내외 학자뿐 아니라 학생, 인근의 직장인까지 6만8천여 명이 박물관을 찾았다.
당시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던 기자도 이날 전시회가 인상적이라 특별히 포스터를 구입해 현재까지 신문사 방에 걸어 놓고 감상 중이다.
향로 발굴 30주년의 의미와 역사적 보전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연합뉴스 기사를 하와이 독자들에게도 전한다. <편집자주>
‘국보 중의 국보’로 꼽히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12월 12일로 발굴 30주년을 맞았다.
1993년 백제의 왕릉급 무덤이 모여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현재 부여 왕릉원) 서쪽에 자리한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향로는 백제 미술사와 고고학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향로는 우연한 기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0년대 초 부여 왕릉원과 주변의 고분 모형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이 늘자 부여군 등은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조성하고자 정비 작업에 나섰다.
1992년 1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이뤄진 시굴 조사에서 건물 주춧돌 일부와 기와•토기 조각 등이 나오자, 1993년 10월 국립부여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2차 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금속품과 유리구슬 등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공방 터(조사 당시 제3 건물터)에 있던 타원형 아궁이에서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 흥건한 진흙투성이에서 나온 1천500년 전 백제 그 자체였다.
발견 당시 향로 아래에는 나무판자 4개가 깔려 있었는데, 공방에서 작업할 때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목제 수조의 바닥 부분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오랜 세월에도 제 모습을 잃지 않은 향로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관심은 뜨거웠다.
약 10일간 긴급 보존 처리를 마친 뒤, 그해 12월 22일 현장 설명회를 열자 언론에서는 ‘백제의 예술혼’, ‘동북아 최고 걸작’ 등의 수식어를 붙여 1면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백제 문화의 정수가 담긴 향로를 보려는 사람들의 문의도 빗발쳤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학계에서도 ‘보면 볼수록 신비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많다.
중국 한나라 때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으나, 섬세한 공예 기술과 조형성, 창의성은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높이 61.8㎝, 무게 11.8㎏인 향로는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돼 있다.
아래부터 보면 힘차게 튀어 오르는 듯한 용이 받침을 이루고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케 하는 몸체, 23개의 산이 4∼5겹으로 돼 있는 뚜껑, 뚜껑 위의 봉황 등이 배치돼 있다.
향로에 생생하게 표현된 86개의 얼굴도 주목할 만하다.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의 새, 무예의 한 동작을 묘사하는 듯한 사람, 세로줄 무늬가 돋보이는 호랑이, 날개 달린 상상 속 동물 등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긴 코와 상아, 커다란 덩치로 표현한 코끼리 모습도 인상적이다.
신나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연꽃잎 한 장, 산봉우리 하나마다 생생하게 담긴 86개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백제인이 꿈꾼 이상세계의 평온함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당대 백제 문화를 보여주는 집약체로 여겨진다.
향로는 벌집과 소기름을 섞은 밀랍 덩어리를 녹여 여러 도상을 새기거나 붙이는 방식인 밀랍 주조법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같은 향로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는 게 학계 중론이다.
공기를 빨아들이는 구멍 5개와 연기를 뿜어내는 구멍 7개 등 총 12개의 연기 구멍 가운데 일부 크기를 수정한 점에서는 당시 백제인들의 정교한 공예 기술도 엿볼 수 있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 사람들의 옷차림, 다양한 동식물 등도 연구할 부분이 많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는 “정말 만나기 어려운 유물”이라며 “향로가 출토된 (역사 문화적) 맥락, 함께 출토된 유물, 당시 금속 공예 기술 등을 폭넓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발굴 30주년을 맞아 향로의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를 열고 있다.
내년 2월 12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백제 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에서는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를 연상시키는 듯한 공간에서 향로와 마주할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상처받은 백제인의 아픔을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심어준 향에 집중한 전시”라며 “하루 평균 1천500명 이상이 관람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오는 12일 ‘특별한’ 손님을 초대하는 행사를 연다.
당시 관장으로서 발굴을 이끈 신광섭 전 백제문화제재단 대표이사를 비롯해 조사 발굴팀과 박물관 관계자들은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 30주년을 기념하는 고유제를 올릴 예정이다.
신광섭 전 관장은 “백제 금동대향로는 우리 고대사의 참모습을 밝혀주는 유일한 증거이자, 그동안 저평가된 백제사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의의를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