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리아 타임스 영문판 기사에 의하면 그동안 필자가 꾸준히 다루어 왔던 이철수 케이스가 드디어 한인 차세대 감독에 의해 다큐멘타리로 제작된다고 한다.
아래에 언급하는 이철수 케이스는 아시안 아메리칸의 법적인 지위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케이스이며 필자로 하여금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아시안 아메리칸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갖게한 사건이었다.
17년간 필자와 함께 열심히 일해 온 폴란드 출신의 어소시에트 변호사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생하는 난민들을 앞장서서 돕고 있다.
우리 법률회사는 다국적 유능한 변호사들과 함께하며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한인 어소시에트 변호사도 필자와 함께 한인 고객들을 돕고 있다.
몇달 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한인 변호사에게 ‘이철수 사건’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이철수 케이스는 미주 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케이스로 필자의 아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눈 케이스이다.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아들이 아버지는 어떻게 변호사직을 선택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될 수 있으면 한인과 다른 소수민족 학생들과 대학교 내에서 시간도 많이 보내고 한인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분석해 보라고 말했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변호사가 된 과정도 설명해 주었다.
필자는 시카고 레인텍크 매그넛 공립고교 재학 당시 공대나 의대를 갈 계획이었다.
이 학교는 시험을 통해 입학하는 학교로 미국에서 Ph. D. 박사학위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고등학교이다.
그러나 필자는 고교 3학년때 우연히 한인 이철수 케이스를 접하고 그의 억울한 사연에 울컥하며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이철수는 필자와 비슷한 어린 나이에 1964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필자는 1969년에 이민 왔다.
그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갱 두목을 죽였다는 억울하고 부당한 형사 재판 결과로 유죄 판결을 받아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시절 미국 내 한인사회는 그 수는 비록 적었지만 한인 언론인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며 한 마음이 되어 뭉쳐 아시안 단체들과 손을 잡고 이철수 케이스의 억울함을 대외에 알리며 그를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 결과 1982년 기금을 모아 이철수 케이스를 다시 재판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무죄를 입증해 이철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훗날 필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법대에 다닐 무렵 한인 단체 행사에서 우연히 이철수를 만날 기회가 있어 당신 때문에 내가 공대가 아닌 법대로 진로를 바꾸었다고 이야기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들에게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하며 이철수 케이스를 영화화 한 ‘True Believer’를 보라고 말했다.
또한 최근에는 ” Free Chol Soo Lee” 다큐를 보라고 말했다.
필자가 변호사가 된 후 우리 한인들은 힘든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강력사건에는 크게 휘말리지 않아 형사법 분야와는 자연히 관계가 멀어졌다.
그대신 주로 한인들이 많이 하는 비즈니스 상법을 많이 취급하게 되었고 소송을 한다고 해도 민사소송을 주로 다루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사반세기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필자의 법률사무소도 3명의 변호사로 시작해 이젠 12명의 전문 변호사와 3명의 법대 학생들이 함께하는 비교적 중견 규모의 법률회사가 되었다.
이철수 케이스처럼 하와이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한인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변호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그날까지 필자의 법대 진학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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