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아이섬 콜로아 신흥소학교 (1911) <사진제공 하와이 이민연구소>
호놀룰루 성누가교회 학교 (1908) <사진제공 하와이 이민연구소>
1907년 마우이 푸우네네 동명소학교 학생과 교사들 <사진제공 하와이 이민연구소>
이덕희 하와이 이민연구소장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부설 ‘하와이 한인사회학교가 올해 7월 개교 50주년을 맞는다.
이민 117년의 역사가 시작된 하와이의 이민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가 미주 최초의 한글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미주한인 이민종가 장자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본보는 6월9일 창간 48주년을 맞아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과 더불어 하와이 한인사회 한국어 교육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며 하와이 유일의 한국어 정론지로서의 역할기대를 생각해 본다.
1. 하와이의 국어학교 역사
이덕희 하와이 이민연구소장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에 가장 먼저 조직된 국어학교는 1907년 4월 7일에 하와이섬 힐로의 <힐로한인소학교>라고 하지만, 누가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당시 힐로 시내에 30명 미만의 한인이 살고 있었고, 신반석 (후에 신홍균으로 바꿈) 전도사가 힐로 – 올라아농장 지역을 위한 한인 감리교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힐로항에서 8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올라아농장은 기차로 갈 수 있었는데, 약 270명의 한인 노동자가 살고 있었다. 신반석 전도사를 위시하여 힐로에 살고 있던 교인들이 시작하였으리라 추측한다.
힐로소학교가 시작된 지 한 달 후 5월 10일에 마우이섬 푸우네네 지방에 <동명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카우아이섬에는 8월 25일에 마카벨리 지방에 <동신학교>가, 11월 4일에 엘레엘레 지방에 <육영학교> 가 설립되었다.
1909년 5월 25일자 신한국보에 ‘국민회가 카우아이섬 콜로아 지방에 학교 설립을 위하여 9달러를 보조하였고, 동포들은 매달 0.25달러-1달러를 후원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0년대 초반까지 하와이섬 7개, 마우이섬 1개, 오아후섬 13개, 카우아이 섬 5개로 총 26개 한글학교가 운영되었다.
그 중 감리교회가 운영한 곳이 12개, 구세군 1개, 한인기독교회 1개, 천도교 1개로, 15개 학교가 교회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924년에는 하와이 섬에 3개와 오아후 섬에 7개의 학교만 남아 있었다.
1928년에 하와이의 총 한인 학생 1,728 중 732명이 국어 학교에 다닌 것을 정점으로 국어학교는 쇠태하였다.
한인들이 농장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초기 이민 교사들과 학생들간의 언어 소통의 어려움, 문화와 세대 차이를 들 수 있다.
또한 1922년 하와이의 외국어 학교법으로 외국어 학교 운영이 까다로워진 점도 한 몫했다.
이민 학부모들은 일반 학교를 ‘영어학교’라 불렀고, 방과후와 주말에 열린 학교를 ‘소학교’ 또는 ‘국어학교’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때는 ‘한글’ 이라는 명칭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이라는 명칭의 시작은1898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1910년 이라고 알려진다.
지금의 ‘한글날’ 은 1926년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 발표 날)을 ‘가갸날’로 시작 되었다가, 1928년에 양력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해졌다.
한인의 국어학교와 비교하여, 1852년부터 계약이민이 시작된 중국인의 중국어 학교는 이민 25년후인 1889년에 시작되었고 , 1885년에 시작된 일본인 이민의 일본어 학교는 이민 11년 후인 189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의 언어 학교가 시작되었을 때 중국인은 1만8,000명, 일본인은 6만 1,000명 이었다. 한국어 학교는 이민이 시작된지 4년만에 정착 인구가 6,000명 정도였을 때 시작된 것이다.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었고, ‘해외동포 보호 또는 보조’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때였다.
국어학교 학비는 학부모가 담당했다.
학부모 부담으로 모자랐을 때는 학교가 있는 사탕수수농장의 한인들이 아니면 교인들이 후원하였다.
자녀가 없는 노동자들도 아이들의 국어 교육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국어학교와 관련하여 감리교회 프라이 (William Fry) 감리사가 1918년 연회에서 ‘한인들이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려는 의욕이 대단하며, 대부분의 경우 교회를 중심으로 한글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밝히고 ‘이에 대해 반대할 이유는 하나도 없지만 이 때문에 곤란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라고 지적했다.
그리고는 ‘한인교회들이 교회목사나 전도사를 위해서는 한 달에 2-5달러만 내면서 모국어 교사들에게는 15-20달러를 주고 있다’고 덧붙혔다.
국어학교에서는 1910년 이후 일본 총독부가 출간한 교과서를 사용하다가, 1911년 6월부터는 국민회에서 자체 교과서를 출판하여 사용하였다.
국민회가 1911년 6월에 2권, 1917년 2월에 3권, 1923년 8월 에 3권을 발행하였고, 1927년 5월에는 독립단이 2권을 출간하였다.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는 국어학교를 따로 운영하지 않았다.
1920년까지 교회와 함께 있었던 한인기숙학교 (1906년 감리교선교부 설립; 1913년에 ‘한인중앙학교’로)에서 국어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1920년에 한인중앙학교가 문을 닫고, 1922년에 교회가 이사한 후, 1923년 2월 말에 부임한 현순 목사가 대동국어학교를 시작하였다.
1925년까지는 현순 목사의 큰딸 앨리스가 가르쳤다.
앨리스는 하와이에서 출생한 (1903년 5월 8일) 첫 한인이다.
1924년에 교사 앨리스와 학생 20명이 있었다.
1925년부터 1937년까지는 1913년에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919년 1월에 온 이정송 (안원규의 부인)이 가르쳤다.
매해 5월 말에 방학식을 했는데, 학생들의 피아노 독주, 합창, 국어낭독, 우스운 이야기, 격언암송, 졸업증서 수여 등 큰 행사였다.
대동국어학교는 1940년 11월 1일에 폐교되었다.
한편, 한인기독교회도 1923년 7월 1일부터 신흥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신흥학교는 1959년경까지 운영되었다.
미국의 1965년 새 이민법이 인종별로 이민자 수를 할당해온 1952년 이민법을 철폐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아시아인이 이민올 수 있게 되었다.
새 이민법은 1968년 7월 1일부터 실행되었고, 1968년에 하와이에 온 한인 새 이민자는 91명이었다.
1969년에 284명, 1970년 596명, 1971년 568명, 1972년 868명, 1973년에 1,305명, 1974년 1,172명, 그리고 1975년에 1,476명이 왔다.
1975년까지 6년 동안 하와이에 이민 온 한인이 모두 6,315명이 되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한 가지 변화는 새 이민자의 자녀를 위한 한글반과 영어반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