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놀룰루 미술관 산책(3) 비 성기게 내리니 강남을 꿈꾼다

한 쪽 다리를 들어 올린 새 한 마리가 무심히 뒤를 돌아 본다. 여러 색이 어우러진 날개는 큼직한 몸을 감싸고, 그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가 가볍게 땅을 딛고 섰다. 먹의 농담을 이용해서 몇 번의 붓질로 그려낸 깃털은 망설임없이 빠른 붓놀림으로 잘 정돈된 날개결을 보여주고, 유난히 긴 부리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뒷 머리의 섬세한 표현은 생동감을 준다. 한반도 전역에서 만날 수 있는 왜가리의 모습이다. 화폭의 중앙에 위치한 왜가리 옆으로는 건조한 느낌의 갈대 무리가 있다. 마디마디 거친 줄기는 속이 빈 갈대의 특징을 드러내고 뾰족한 끝을 지닌 잎은 아래를 향해 뻗어 새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함께 가리킨다. 그 중 유독 높이 솟은 갈대 한 줄기가 흐드러지는 꽃을 흩날리며 화면에 공간감을 더한다. 간략한 먹선 몇 개로 왜가리의 동선과 시선, 그리고 공간을 묘사한 이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그림과 유사한 필치로 글씨가 적혀있다. 작가가 적어 놓은 그림의 화제(畵題)이다.    踈雨夢江南   비 성기게 내리니 강남을 꿈꾼다. 비가 성기게 내린다는 것은 빗줄기가 약하게 내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 옛 시에서 가을비를 묘사할 때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10월이면 꽃이 피기 시작해 11월쯤 만개하여 늦가을에 장관을 이루는 갈대를 화폭에 그려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화가는 제목에서도 그림의 배경이 늦은 가을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강남을 꿈꾼다는 표현에서 강남은 따뜻한 기후를 가진 남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제목의 전체적인 의미는 가을비가 추위를 재촉하니 따뜻한 지역으로 떠날 생각에 잠긴다는 뜻이 된다. 그림에서 묘사한 왜가리를 염두에 둔 제목이다. 왜가리는 여름이 되면 한반도 전역에서 만날 수 있지만, 추위가 찾아오면 따뜻한 곳을 찾아 한반도 중남부 지역 혹은 더 멀리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겨울을 나기 때문이다.   그림의 좌측 중간 윗부분, 길게 드리워진 갈대꽃 아래에도 같은 필치의 글씨가 적혀 있다. 이 것은 작가의 낙관(落款)이다.    平壤 楊石然  평양 양석연 이로써 그림은 조선 후기의 화가 양기훈(楊其薰, 1843-?)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양기훈은 평양 출신 화가로 호가 석연(石然) 혹은 패강노어(浿江老漁)였는데, 특히 패강은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에, 평양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던 그의 활동 무대를 짐작하게 해 주는 명칭이다. 그림 속에 본인의 고장 평양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적어 넣은 작가는 겨울이 찾아오면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던 왜가리를 묘사하며 곧 다가올 추위와 먼 이동의 심란함까지 화폭으로 옮겨 놓았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의 쓸쓸한 감성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양기훈비 성기게 내리니 강남을 꿈꾼다.  한국 조선시대 19세기비단에 수묵쉘든 제링거 기증 (8778.1) <이미지 정보>Yang Ki-hun (1843-post 1919)Dreaming of Kangnam in the Light rainKorea, Joseon dynasty, 19th centuryHanging scroll; ink on silkGift of Sheldon Geringer, 1997 (8778.1)Wood with traces of pigment  

오 가 영호놀룰루미술관 아시아부 한국미술 담당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객원 큐레이터 <고송문화재단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