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기념 특집기획] 하와이 ‘길’ 이름 속에서 이민선조들의 발자취를 찾는다

누우아누 애버뉴는 1850년에 지어진 시내 29개 길 이름 중의 하나이다.  1848년에 카메하메하 3세(카메하메하 대왕의 둘째 아들)가 토지개혁을 단행한 후 택지조성과 더불어 도로정비를 하면서 길 이름도 지었다. 지금의 킹, 퀸, 베레타니아( Beretania: ‘영국’을 뜻함) 스트릿 등이 이때 지어진 이름이다.  누우아누란 하와이 말로‘시원한 언덕’이라는 뜻이다. 호놀룰루 항 부근의 누우아누 애버뉴 1038 번지 건물에 합성협회가 임대한 사무실이 있었다.  합성협회는 1909년 8월 말에 하와이에 존재했던 24개 단체와 동회의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5일 동안의 연속 회의를 하고, 9월 2일에 모든 단체를 통합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이 회관에서 10월 22일부터 <합성신보>를 발간 했다.   하와이 전체 47개 지역에 지회가 설립되었고, 1,051명의 회원이 있었다. 1909년 2월1일에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미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1919년 4월 14일에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그리고 4월 24일에 한성(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대통령)로 추대되었다.  국민회가 이승만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8월 17일 일요일 오후에 누우아누 애버뉴 1179번지의 자유극장(Liberty Theatre) 에서 경축식을 가졌다.  1,600석의 극장에 1,200명의 한인들이 모여 “독립만세 3창을 불렀다고 스타 블루틴에 기사가 실렸다.  1920년 3월 1일 월요일 오전에 또 한번 이 극장에 1,0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지금 자유극장부지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우아누 애버뉴 1742번지에 일본 총영사관이 있다. 일본 영사관은 베레타니아와 퍼트 (Fort) 스트리트  모퉁이에 있다가 1913년에 이 곳으로 이사 왔다. 대부분의 사진신부의 남편 될 사람들이 이 영사관에 와서 부인될 사람의 여권을 신청하였다. 누우아누 애버뉴 2233번지의 누우아누 묘지공원에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묘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 많지 않다.   길 건너, 누우아누 애버뉴와 져드 스트리트 모퉁이의 오아후 묘지공원에는 약 200기가 있다.    그 차이는 오아후 묘지는 1844년부터 이곳에 있었고, 누우아누 묘지는 1949년에 이 곳으로 이사 왔기 때문이다.  오아후 묘지공원에서 동지회 호상부 이름으로 된 비석 서너개를 볼 수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초기 이민의 장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회와 동지회가 각각 호상부를 두고, 장례비용을 준비하는 제도를 마련 했었다.  각 호상부들이 특히, 독신으로 돌아간 회원들의 장례를 맡아 했고, 비석까지 세워주었던 것이다.   오아후 묘지공원 길 건너 져드 스트리트 (45 North Judd Street)에 있는 성누가 성공회 교회는 1905년 말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성 앤드류성당 구내의 작은 건물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인 회중의 찬송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교인의 예배를 방해하였기 때문에 이올라니학교 건물 (현 주지사 관저) 과 성 앤드류 대성당 사이에 있는 암스트롱 하우스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08년에 성 엘리자벳교회 (720 North King Street) 로 이사하여, 성 엘리자벳의 한어부로 있다가, 1917년 부활절에 성 누가선교회라는 자체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52년 7월에 지금의 교회당을 새로 짓고 이사 왔다.  서양인 설계사가 한국 양식이라고 설계하였지만, 지붕선이 중국 건축양식에 더 가깝다.  

그래도 1938년에 광화문 문루를 가미하여 세워진 한인기독교회에 이어 호놀룰루에 세워진 두 번째 한국 건축양식의 교회 건물이다.    져드 (Judd) 스트릿은  의료 선교사이며 카메하메하 3세 재임 중 총리대신이었던 게릿 져드(Gerrit P. Judd)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근처에 있는 다우셋 (Dowsett) 애버뉴는 1828년에 하와이에 온 선장 새무엘 다우셋 (Samuel Dowsett)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다우셋의 아들 제임스 (James)는 미국선교사 자녀를 제외하고 하와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백인 아이로 유명했다. 옛 한국독립문화원이 있었던 룩 (Rooke) 애버뉴는 1832년에 온 영국인 의사 룩 (T.C.B. Rooke)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룩 의사는 엠마 여왕의 양아버지였다.  룩 애버뉴의 옆길이 푸우누이 (Puu Nui: ‘큰 언덕) 애버뉴인데, 1913년 2월에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 박사가 이 길 2453번지 집에 살았다.   이승만 박사는 이 집에서 2개월 만에 저술, 출판한 『한국교회핍박』에서 ‘새로 세워질 나라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승만 박사는 1915년에 이 길 끝에 3.5에이커의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한인여학원을 개교하였다.  하와이에서 한인 남학생을 위해 지어진 첫 학교는 한인기숙학교로, 한인 성금 2,000달러와 미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하와이 감리교선교부가 총 1만 8,000 달러를 들여 1906년에 설립하였다.   반면에 한인여학원은 순전히 한인들의 성금으로 설립되었다.  한인여학원은 1918년 봄학기부터 남학생도 받았고, 가을학기부터 남녀공학인 한인기독학원으로 개편되어 와이알라에이 있는 구 알리이올라니 학교를 임대하고 이사하였다. 한인여학원은 당시 조합교회가 운영한 태평양학교 (지금의 미드팩학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1917년 2월에 이 학교가 주관한 축제에 한인여학원 학생들은 광화문 모형의 꽃차 (float)를 만들어 참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이승만 박사는 광화문을 한국의 상징으로 선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