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이민사연구원
카이무키의 ka는 전치사로 영어의 the와 같고, imu는 오븐, ki는 Ti 나무라는 뜻으로 카이무키는 “Ti 나뭇잎을 깔아 놓은 오븐” 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메네후네(menehune)라는 난쟁이들이 만든 오븐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상가지역에 시드니 코사사(Sidney Kosasa)라는 약사가 1949년에 카이무키 트리프티(Kaimuki Thrifty) 약국을 개업하고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1956년에 이름을 카이무키 약국이라고 고쳤고, 1960년대에 이르러 오아후 섬에 12개의 약국을 가진 큰 사업으로 일구었다. 1965년 관광산업이 번창하는 것을 보고 와이키키에 첫 번째 <ABC Store> 상점을 열었다. ABC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외국 관광객이라도 ABC는 기억을 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착안이 적중하여, 지금은 하와이 전역은 물론, 괌, 사이판 그리고 라스 베가스까지에 60개가 넘는 상점이 있다. 900여명 점원이 연 평균 2억 달러를 넘는 총 수입을 올리는 하와이의 대기업중 하나로, 하와이 관광산업의 대명사가 되었다. 카이무키 지역은 1848년 하와이 대토지 개혁 때 윌리엄 루나릴로 (William Lunalilo: 카메하메하 대왕의 조카 손자로 하와이 왕국의 6대 왕이 됨)가 카메하메하 3세 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다. 후에 폴 아이젠버그 (Paul Isenberg)가 이 땅을 사서 와이알라에 목장을 운영하였고, 1898년에 두 개발업자가 520 에이커의 땅을 아이젠버그로부터 사서 주택단지를 개발하였다. 지금의 카파훌루 애버뉴, 와이알라에 로드, 오션 뷰 (Ocean View) 드라이브, 그리고 다이아몬드 헤드 뒷길의 지역이다. 개발 당시에 1만5,000 평방 피트의 주택지를 400 달러에 팔려고 하였으나 빨간 진흙 덩어리의 땅이 비가 오면 질척거려 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마침 1900년 차이나타운의 화재로 많은 중국인 이재민들이 생겼고, 이들이 이 지역에 입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이 새 주택단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25년 시 정부가 길을 포장한 이후부터였다. 그 후 와이알라에 애배뉴 상가지역이 호놀룰루의 다운타운과 함께 2대 상가지역으로 부흥하였으나, 1959년 알라모아나 샤핑센터가 세워지고 뒤이어 카할라 (Kahala: 물고기 이름) 샤핑센터가 세워지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와이알라에 (Waialae)라는 단어는 “알라에라는 하와이 새의 물”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예전에 새들이 모여든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새가 울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하와이 미신이 있다. 1905년에서 1925년 사이에 한인들이 사탕수수농장을 떠나 호놀룰루 시내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정주한 곳 중의 한 곳이 카이무키 지역이었다. 1918년에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이 와이알라에 애배뉴에 있던 구 알리이올라니(Aliiolani) 학교 건물 (현 알리이올라니 초등학교)을 임대한 것은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922년에 현 칼리히 초등학교 부지로 이사하여 기존의 건물을 사용하다가 1923년에 새 학교 건물을 건립하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24년부터 약 2년간 살면서 『태평양잡지』를 발행한 집은 카이무키 지역에서 산 쪽으로 올라간 윌헬미나(Wilhelmina)지역의 럴라인 (Lurline) 1521 번지이다. 럴라인은 맷선항해회사 사장의 딸 이름인데, 윌헬미나, 럴라인 등의 이름은 모두가 맷선항해회사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은 1960년 4월 19일의 의거로 4월 26일에 하야한 후, 하와이 동포들의 요청으로 3~4주일 휴양할 계획으로 5월 29일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부터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에 마우날라니(Maunalani) 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 마우날라니 요양원의 주소가 5113 Maunalani Circle인데, 1924년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잡지를 발간하면서 살던 집에서 한 골목 떨어진 곳에 있다. 1925년 여름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한 동아일보 고문 송진우가 ‘바라쿠’ 2층 건물에서 기거하며 사무를 보고 있는 이승만 박사의 사무실겸 집을 방문하고 쓴 기사가 남아 있기도 하다. 와이알라에라는 단어는 물 와이 (wai) 와 알라에 (alae)라는 합성어로 ‘알라에의 물 ‘이라는 뜻이다. 예전에 이 새들이 모여든 곳이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인 것 같다. 주소가 7가 1240번지로 되어 있는 알리이올라니 (Alliiolani) 초등학교 전경을 와이알라에 애베뉴에서 볼 수 있다. 이 알리이올라니 학교는 한인기독학원이 있던 곳이다. 이승만 박사가 1915년 가을에 설립한 한인여학원이 잘 운영되고 있자, 학부모들이 남학생도 받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 한인여학원은 순전히 한인의 후원금으로 설립된 해외 최초의 여학교 (8학년까지)였다. 그리하여 이승만 박사는 1918년 봄학기부터 남학생들이 입학했다. 가을 학기에 학교를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으로 재조직하였다. 그런데 한인여학원 시설은 증가된 남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고, 학교부지 자체는 경사가 심해 시설을 더 지을 수 없었다. 마침 그 때 폐교하여 비어 있던 알리이올라니 학교를 임대 할 수 있었다. 이사하여 찍은 전교 학생과 교사 사진에 알리이올라니 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사진 한인기독학원 기념 동판> 2018년 12월 18일 한인기독학원 기념동판이 세워졌다. 와이알레아 애버뉴 길 버스 정류장 옆 철조망 안쪽에 있다. 한편, 이승만 박사가 제일한인감리교회 (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에서 탁사 (이사)로 교회를 인도하며 주일 설교도 하였다. 그런데, 담임목사들이 없는 시기가 잦아지고 또 길어지는 동안 교인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교우들 집에서 사교 겸 저녁 모임이 많아지면서, 이 모임이 특별 예배모임이 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교인이 많아지면서, 개인 집에서는 모일 수가 없게 되어, 한인여학원에서 모이다가 한인기독학원으로 옮겨와서 모였다. 드디어 1918년 12월 23일에 특별 예배모임의 대표 14명이 한인기독학원에 모여, 이 예배모임을 <한인기독교회>라는 이름의 새 교회로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금 릴리하(Liliha) 스트릿에 있는 한인기독교회가 ‘탄생한 곳이 바로 알리이올라니 초등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