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기념 특집기획] 하와이 ‘길’ 이름 속에서 이민선조들의 발자취를 찾는다

이덕희 하와이 이민사연구원

지금의 하와이 카이 (Hawaii Kai) 지역의 역사는 1961년 4월 29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헨리 카이저 (Henry J. Kaiser)가 당시의 비샵재단 (카메하메하 학교재단의 전신)의 땅 6천 에이커를 개발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한 날이다. 47년 전의 일이다. 
 미국의 후버 댐과 본네빌 댐 등 대형공사를 한 건설회사, 대형 선박을 짓는 조선공사, 철강 회사, 시멘트 회사, 의료보험 및 병원 등을 소유한 71세의 실업가 카이저가 하와이에 온 것은 1953년이다.
 비샵 재단과 계약한 6천 에이커의 땅은 카이저의 ‘하면 된다’는 정신과 ‘역경에 도전’하는 정신이 없었으면 생각도 못해 볼 땅이었다. 
 쿠아파 폰드 (Kuapa Pond)는 하와이의 전통식 고기 못(밀물 때 들어 온 물고기들을 가두어 놓고 길러가며 잡는 자연 양식장)으로 주변은 온통 습지이고, 하하이오네 (Hahaione: ‘부서진 모래’ 라는 뜻), 카밀로이키 (Kamilo Iki: ‘작은 밀로 나무’), 카밀로누이 (Kamilo Nui: ‘큰 밀로 나무’)와 칼라마 (Kalama: ‘라마 나무’) 계곡들은 돌덩어리들로 가득 차 있는 불모지였다. 

호놀룰루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상•하수도, 전기, 전화 등을 연결하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과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문제였다. 
 그러나 카이저는 하수종말처리장, 칼라니아나올래 고속도로 4차선 확장, 프트락 (Portlock: 영국 선장 Nataniel Portlock) 다리 확장공사 등을 사비로 충당하는, 획기적인 개발 형식을 택하였다. 
 호놀룰루 시나 주 예산을 책정받아 그런 사회간접시설을 설치하려면 규제가 너무 까다로울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카이저의 성격으로는 그런 방식을 택할 수 없었다. 
 더욱이 비샵재단과의 계약에 6천 에이커 내의 각 단지 개발은 재단이사회에 계획도를 제출하고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카이저는 그런 절차를 따를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카이저는 각 단지를 개발할 때마다 비샵재단과의 계약조건을 편리하게 잊어버리곤 했다.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카이저에 지쳐버린 비샵재단은 드디어 최후의 경고장을 보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개발하면, 모든 일을 중단시키겠다.  다만 모든 사고와 위험의 책임을 감수한다면 괜찮다.”라는 것이었다. 

이 경고장을 받은 회사 임원들이 안절부절할 때 카이저는 껄걸 웃으며 내가 책임지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허락이 아니냐며 승리를 자축하였다. 
 이렇게 모든 일을 서둘러 지은 결과로 1961년 말에 첫 번 가족들이 입주하였다. 

해변의 집은 1만9,000 달러에, 코코 헤드 테라스 (Koko Head Terace)는 2만 달러, 그리고 비싼 마우날루아(Maunalua Triangle) 집은 3만 달러였다. 

물론 임대 땅이었지만, 당시로서도 파격적으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하와이 카이’라는 이름은 직원들에게 이름짓기 대회을 열었으나 마땅한 이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카이저 자신이 ‘하와이 물가’라는 뜻으로 지었는데 ‘카이’는 카이저의 첫 음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지난 40여년 동안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의 우수 개발업자들이 다양한 고급 주택을 지어, 지금은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카이저가 계획한 하와이 카이는 6만 명 주민의 지역이다. 
 1967년 8월 24일에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카이저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코코 마리나 샤핑센터에 서 있다. 

그 비에는 그가 즐겨 외우던 테니슨 (Alfred L. Tennyson)의 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 먼 먼 앞날을 내다보니 이 세계의 비젼과 그에 따르는 기적들이 보였다.”

[미주한인재단 하와이/건국대통령 우남 숭모회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