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고 김찬제 주니어 이야기

6.25 동란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때 서울에 있으면서B-29 비행기가 뜨면, 이불을 잔뜩 올려놓은 침대 밑 “방공소”에 숨곤 했다.

사간동 집으로 올라가는 개울에 잔뜩 쌓인 시체들 중에 애기를 감싸 안고있는 아주머니를 보며 “애기가 다치지 않게 했구나~” 라는 안타까운 생각을 했었다.

이런 기억를 갖고 있는 필자가 2022년 주청사 마당에 았는 하와이 출생 한국전 전사자 기념벽 (사진 아래, 1994년 설립) 앞에서 90세 넘은 참전 용사들에게 “여러분이 한국전에 참전해 주셔서 오늘 제가 여기 서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하며 울컥했었다.

평생 처음으로 참전 용사에게 한 고맙다는 말이었다. 그후, 참전기념벽에 새겨진 Chan J.P. Kim Jr. (사진 위)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찬제 주니어의 아버지 김찬제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다.

김찬제는 7살때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으로 인천 내리교회의 권사 김이제 형님 내외와 함께 이민왔다.

와이알루아 농장에 정착하였는데, 형님이 여러 농장교회 목회로 돌아다니게 되면서 김찬제는 호놀룰루의 한인기숙학교에 다녔다.

1911년 3회 졸업생이 되었고, 같은 반에는 후에 2대 주미대사가 된 양유찬도 있었다.

그 후 김찬제는 워싱톤 주립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다.

김찬제는 호놀룰루로 돌아와서 엔지니어회사에서 조수로 2년의 경험을 쌓았다.

1925년부터 한인의 첫 엔지니어 회사인 C.H. Kim Associates라는 건축설계, 구조공학, 기계공학 전문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하와이은행, 호놀룰루 미술관 등 많은 건물 설계에 참여하였다.

1938년 4월 24일에 한인기독교회 교인들이 건물 정면에 광화문 문루를 가미한 새 교회당 봉헌 예배를 드렸다.

전세계에 유일한 광화문 문루가 가미된 교회당이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기록은 없다.

1904년 7살에 부산에서 온 건축위원장 양유찬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은 명확하다.

1917년 한인여학원 학생들이 태평양학원 주관의 학생축제에 “광화문 꽃차”를 만들어 참가했었는데, 이승만 박사의 아이디어였다.

7살에 인천에서 온 김찬제가 광화문을 본 적도 없었으나, 사진을 보고 설계했던 것이다.

김찬제는 1923년 7월에 감리교 전도사 박세환의 딸 사라 박 (Sarah Park)과 결혼하고 4남 1녀를 낳았다.

자녀 모두 영어 이름에 중간 이름으로 Park을 넣었는데, 1929년생 막내 아들의 이름은 영어 이름이 아니고 아버지 이름 “찬제” 에 “주니어 Junior”를 넣었다.

찬제 주니어(사진)는 맥킨리고등학교 졸업 후 워싱톤주립대학교를 1년 다니고 1948년 9월에 입대하였다.

주둔지를 선택할 때 어머니가 “알라스카보다는 일본에 주둔하면, 아버지 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게 될 터이니 일본을 선택하는게 좋겠다”라고 하여 일본 주둔을 선택했다.

6.25 동란이 일어나자 7월 1일에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미 육군 제4 사단, 34 보병대가 제일 먼저 한국에 상륙하여 평택-천안 지역에 배치되었다.

7월 8일에 찬제 주니어는 인민군의 포로가 되어 실종되었다.

하와이 출생 한국전 참전 미군 중 첫 포로였고,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7,000여명 “실종자”의 한 명이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2023년 6월 필자는 어렵게 찬제 주니어의 형 리차드 김이 힐로에 산다는 것을 알아내고 편지를 보냈다. 7월 어느날 찬제 주니어의 작고한 맏형의 딸 라니에게 전화를 받았다.

양로원에 있는 리차드 김의 보호자로 우편물 등을 책임지는데, 필자의 편지를 읽고 연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반가워서 나를 소개하면서, 찬제 주니어에 관하여 알고 싶어 연락했다고 알렸다.

여조카의 답에 쿵하고 가슴이 메어졌다. 그 답은 “Yes, we are still waiting for him to come home. 네, 우리는 아직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였다.

삼촌이 실종/사망한 후에 태어난 라니는 할머니가 돌아 가실 때 까지 “내가 일본에 주둔해서 아버지 나라를 방문하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주니어가 죽지 않았을텐데~~” 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찬제 주니어의 바로 윗 형님 리차드는 워싱톤주립대서 약사학위를 받은 후 60여년간 워싱톤에서 약사로 일하고 2015년에 힐로로 이사왔다.

올해 95세로 요양원에서 가장 가까웠던 동생을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워싱톤 주의 풀만 (Pullman)에 살고 있을 때 그 곳에 한국전 참전용사비를 세우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동생을 기리는 마음에서 였다.

라니가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으로 부터 받은 김찬제 주니어 관련 서류철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는 1954년 2월 9일자 공문이 있는데, 내용은 1950년 7월 8일에 포로로 실종된 김찬제 주니어의 사망일자를 1951년 1월 31일로 공식화한 것이다.

포로가 된 후 약 7개월간 끌려다니다가 북한의 한장리라는 곳에서 사망하였으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이 보다 앞서 1951년 11월 29일에 육군 사무처가 김찬제의 유품목록을 어머니에게 보내면서, 이 편지 뒷면에 집주소를 확인해 주면 유품을 보내드릴 것이라고 한 문서도 있다.

유품중에는 사진 앨범도 있었다. 어머니는 “내 아들의 유품 모두를 집으로 보내달라 Please send all my son’s belongings home.” 는 답을 보냈다.

막내 아들이 포로로 실종된지 1년 6개월 후 아직도 그가 어느 곳에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아들의 유품을 받은 어머니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참전용사 모두에게 고마움을 드리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