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소장이 3.1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즈음해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하와이 한인사회의 당시 현황과 선조들의 활동을 하와이 로컬 신문에 개재되었던 기사를 통해 새롭게 조명한 연구자료 중 일부를 발췌해 2회에 걸쳐 연재한다.]
1919년 4월 12일 한인기독학원에서 3.1 운동 축하식 모습
애드버타이저와 스타 블루틴의 기사 1919년 하와이 한인에게 3월 1일 독립운동 (이하 3.1운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3월 9일 늦은 저녁이었다. 국민회에 온 이 소식이 얼마나 빨리 한인동포들에게 알려졌는지 또한 한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출간된 <국민보> 나 <태평양잡지> 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영자 조간신문 패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이하 애드버타이저) 와 석간 호놀룰루 스타 블루틴 (이하 스타 블루틴) 이 계속하여 3.1운동 소식 기사를 실었다. 1919년 3월 10일자 스타 블루틴에 “한인들 독립을 선포”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이것이 3.1운동 소식을 전한 첫 신문 기사이며, 다음 날 3월 11일에는 애드버타이저가 동경에 있는 약 1,200명의 한인 유학생의 동태를 전하면서,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그 후 3월 28일에 애드버타이저는 신문 첫장 전면에 여러 소제목을 곁들여 3.1운동을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영문 독립선언서까지도 실었다. 애드버타이저는 영문 독립선언서를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 신문 발간인 맥클랫치 (V.S. McClatchy)로부터 받았다. 우연히도 맥클래치 부부가 한국을 방문하고 있는 중에 3.1운동 현장을 목격하였고, 맥클랫치가 미국인에게서 영문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아직까지 누가 영문으로 번역했는지 한국의 학자들도 모른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의 재팬 애드버타이저에게 1 본을 주었고, 3월 27일에 호놀룰루에서 애드버타이저와 인터뷰 할 때 1본을 주었다. 애드버타이저는 맥클랫치와의 인터뷰 내용을 3월 28일자 첫면 하단에 “맥클랫치 항거도중 한인들이 몽둥이로 맞는 것을 목격” 이라는 소제목으로 실었다. 맥클랫치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이 선언서를 연합통신에 주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한글신문 신한민보는 연합통신을 통하여 입수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4월 8일에야 실었다. 미국 전체에서 하와이가 제일 먼저 영문 독립선언서를 접한 것이다.
사진 3월 28일자 애드버타이저 전면
4월 30일에 애드버타이저는 또 다른 독립선언서를 개재하면서, 이 선언서는 박용만이 번역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부제목으로 박용만과 이승만이 공동 선언인임을 밝히면서, 전에 (3월 28일) 발표한 선언서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설명도 덧붙혔다. 다음 날 5월 1일 스타 블루틴은 국민보 편집인 승용환의 말을 인용하면서, 어제 조간 신문에 발표된 선언서는 ‘완전 가짜 pure fake’ 라고 기사화하였다. 승용환이 ‘박용만은 국민회 회원이 아니며, 번역/분포할 권리가 없는 사람’ 이라고 설명하였음도 밝혔다. 이 선언서는 1919년 2월자로 되어 있는 이른바 <무오 선언서>로 하와이의 이승만과 박용만 등 공동선언자 39명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사실은 당시에 승용환이 이 무오 선언서가 있었던 것을 몰랐기 때문에, 스타 블루틴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박용만은 1912년 12월부터 1915년 초까지 국민회 발행의 국민보 편집인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1918년 7월에 국민회와 절연하고, 칼리히연합회를 결성하면서 태평양시사를 발간하였다. 1919년 3월 3일에는 칼리히연합회를 확대하여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5월 9일에 하와이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두 영자 신문은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일까지 계속하여 3.1운동 관련 기사를 각각 80개가 넘도록 기재하였는데, 하와이 한인의 활동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관하여도 자세히 보도하였다. 1918년 1년동안 애드버타이저는 하와이 한인에 관한, 특히 교육과 교회에 관한 기사가 20개 정도 보도하였고, 스타 블루틴은 30개 정도의 기사를 실었던 것과 대조된다. 대조선독립단의 이원순은 3.1운동 초기 애드버타이저의 보도에 깊은 인상을 받고, 1919년 4월 25일에 애드버타이저에 실렸던 3.1운동 관련 기사 등을 모아 <<한인 반항의 진실과 독립선언서>>를 출간하였다. 애드버타이저와 스타 블루틴 기사에 기초하여 3.1운동 후 1년 동안 하와이 한인들이 펼쳐간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인사회의 활동 1) 각 교회에서 특별 기도회 3.1 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각 교회에서는 매일 밤 기도회를 갖고 조국이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하였다. 당시 하와이 전체에 13개의 한인 감리교회, 3개의 성공회교회 (성 누가, 하와이 섬 케헤나와 코나 회중)와 무교파의 한인기독교회 1개가 있었다. 감리교회는 오아후 섬에 4개 (제일한인, 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에바; 와이알루아-카후쿠; 와히아와), 카우아이 섬에 2개 (리후에, 마카벨리-콜로아), 마우이 섬에 2개 (하나, 스프렉스빌-파이아), 하와이 섬에 5개 (힐로, 호노카아, 파파알로아, 파할라, 코할라) 가 있었다. 성 누가성공회교회, 한인기독교회 그리고 그리스도교회는 호놀룰루 시내에 있었다. 이 모든 교회에 등록된 교인 수는 600~700명이었는데, 이들 모두가 기도모임에 참석하였을 것이고, 교인이 아닌 사람도 3.1운동에 관하여 알고자 가까운 교회에 모였으리라 생각한다. 언제까지 특별 기도회가 계속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설립될 때까지 한인들의 기도 제목은 ‘조국의 독립’이었을 것이다. 2) 3.1운동 경축 행사 4월 4일에 국민회 (1913년 2월 조직)를 대표하여 방화중, 정윤필, 신성일이 호놀룰루 시장 펀 (Joseph Fern)을 찾아가 4월 12일 토요일에 카피올라니공원에서 경축행사를 갖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시장이 거절하자, 4월 9일에 시의회에 찾아가 같은 요청을 했다. 시의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5,000 명의 한인 인구가 하와이 총 인구 약 26만명의 2% 도 안되지만, 약 11만명 (43%)의 일본인을 위시하여 다른 여러 민족이 살고 있는 다민족/다문화 하와이에서 사회적 소란 내지는 민족간 갈등이 일어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국민회는 와이알라에 있는 한인기독학원에서 경축대회를 가졌다. 한인기독학원은 이승만이 1915년 순전히 한인의 후원금으로 설립했던 한인여학원을 1918년 가을에 남녀공학으로 재조직한 초, 중학교이다. 스타블루틴은 4월 12일자 1면에 한인들이 공화국의 탄생을 축하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런데 6면에는 “한인들의 독립시위를 권장해서는 안 된다. 멜팅 팟 (melting pot: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뜻함)이 끓어 넘치면 안 된다.” 는 사설을 실었다. 하와이 정치 지도자와 신문매체들이 사회적 소란이 일어날까 조심스러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800명이 넘는 (신한민보는 4월 17일에 “1,200명의 독립경축, 하와이 한인의 시위운동” 이라고 보도) 한인들은 호놀룰루 시 제2 치안판사 알렉산더 라르낙 (Larnach)의 연설, 방화중이 “한국의 독립은 국내외 한인의 단합, 전세계의 동정과 소약국동맹회를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다.”고한 연설 등 여러 지도자들의 연설과 축사를 들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는데, 우뢰 같은 박수가 있었다고 스타 블루틴이 보도하였다. 경축식 끝에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대한인 총대표회에 참석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보낼 4개 조항의 결의문도 채택하였다. 1) 국민회가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 2) 한인대표단을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달라고 미 국무장관에게 청원할 것, 3)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저지른 잔악함을 미국인에게 알릴 것, 4) 새로운 한국 정부는 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과 같은 정부 형태로 조직될 것 등 이었다. 식이 끝난 후에는 운동회를 갖고 달리기, 공놀이, 전통 스포츠 등을 즐겼다. 정확하게 이 운동들, 특히 스타 블루틴이 ‘국가 스포츠(national sports)’라고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하와이 한인들이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치하하는 축제를 열었던 것이다. 스타 블루틴이 보도한대로 800명 한인이 이 축제에 모였다는 것은 당시 호놀룰루 시내에 살고 있던 835명의 한국 출생 한인 모두가 참여하였다는 것이 된다. 아니면, 호놀룰루 시내를 포함하여 오아후 섬 전체에 살고 있던 한국 출생 1,570명 중 반 이상이 이 축제에 참석한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런 축제는 없었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