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대한인동지회 100년을 돌아본다 (2)

  1. 3. 동지회와 다른 단체들과의 관계
호상부원 묘비 (오아후 묘지)

동지식산회사가 문을 닫기(1931년 4월 경) 전, 1930년 7월 15일부터 7월 21일까지 호놀룰루에서는 동지회 美布(미포=미국과 하와이)대표회가 개최되었다.

이 미포대표회에서 동지회의 조직을 강화하고 총재인 이승만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이승만을 지지해온 교민단 (국민회) 과 동지회가 갈라서게 되었다.

1930년도부터 10여년동안 단일화된 정치활동을 전개하려한 단체연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각 단체들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고, 또 일부 연합된 단체와 임시정부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 4. 동지회의 출판활동

1913년 9월에 재정문제로 폐간된 감리교 교회보를 살리는 방편의 일부로 시작된 『태평양잡지』 (1930년에 『태평양주보』로 바뀜)는 58년동안 하와이 한인들의 뉴스 매체로 고국 소식, 재외 한인들의 소식을 전했고, 또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정세를 알렸다.

특히 세계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조국의 국권회복의 과정과 소망을 버리지 않도록 여론을 이끌었다.

『태평양주보』는『국민보』와 미주 본토의『신한민보』와 함께 미주 한인사회에서 뉴스 매체의 주도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지회 회원 독자들의 구독료와 기부금으로 운영되어 오면서 적자를 면치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970년 2월초까지 초기 이민자들과 함께 한 것은 미주 한인 이민 역사의 커다란 사건이다.

『태평양잡지』출판은 이승만의 주동으로 시작되었고, 한때는 그가 사장으로 회사 운영에 또 기고자로서 하와이 한인들의 여론을 이끌었다.

한편 잡지사가 58년간 계속 운영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다름아닌 동지회 지도자들의 노고가 있었고, 언론매체의 중요성을 인지한 독지가들의 독려가 있었다.

지금은 전 세계의 뉴스를 즉석에서 접할 수 있는 TV와 인터넷의 발달로 뉴스 인쇄물에 대한 필요성이 없어져 갈 정도이지만, 20세기 초 문맹자를 포함한 한인 이민자들에게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또한 세상사를 알 수 있게 한 동지회의 출판사업은 자랑스런 큰 사업이었다.

남아 있는 『태평양잡지』 와 『태평양주보』는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1. 동지회의 사회복지 활동

1930년대는 이민 30년이 되면서 증가하는 노인들의 사망으로, 특히 가족이 없는 독신자들의 장례가 이민사회의 문제로 대두 되었다.

1938년에 동지회 회원이 약 930명이었는데 동지회는 이들 회원의 장례절차와 비용을 책임지기 위하여 호상부를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동지회 회원만이 호상부원이 될 수 있었는데, 조금 후에는 동지회 회원 아닌 사람들도 가입힐 수 있었다. 호상부 입회비를 내고 호상부 회원이 되면 매달 회비를 내고, 부원이 사망하면 모아 놓은 회비에서 장례비를 치뤘다.

계속되는 호상부원의 증가와 착실한 적금으로 동지회 호상부가 흑자로 운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금을 저축할 수 있게 되었다.

1942년 10월에 동지회 호상부의 저축금이 4,000달러가 되었다. 이 저축금과 약 6,000달러의 은행 차관을 받아 10월 27일에 931 N. King Street의 건물을 구입하였다. 이 건물은 동지회가 1932년부터 10년동안 장기 임대해 온 동지회 사무실 건물이다. 이 부지에는 건물 2동이 있어, 앞 건물 아래층의 4 개 상점은 임대를 주었고, 윗층은 동지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뒷 건물은 3층 건물로 각 층에 아파트 3 채가 있었다. 동지회 호상부는 상점과 아파트 월세 수입 250 달러와 호상부 적립금으로 차관을 갚았다.

1970년 2월 8일에 동지회 및 호상부대회를 동지회관에서 가졌는데, 동지회원 7명과 호상부원 33명이 참석하였다. 동지회 회원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특별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회관도 필요 없게 되었음으로 동지회 회관을 매각하기로 결정하였다.

생존하는 호상부원에게 각 260 달러의 호상금을 지불하면서, 미납한 호상금과 연례금이 있으면 그 액수를 제하였다.

그리고 매각금 19만 달러를을 “이승만 박사 장학기금”으로 예치하였다. 1972년 첫 해에 4명의 장학생에게 200-500달러의 장학금을 수여하기 시작하여 매해 학생수와 장학금 액수도 많이 증가되어왔다.

2021년 장학금 수여식은 7월 중순에 있을 예정인데, 11명에게 각 2,000달러가 지급될 것이다. 또한 동지회는 1980년에 하와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건물을 건립할 때 10,000 달러를 기증하였다.

맺는 말

하와이 대한인동지회는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필수적인 재정 부담을 해 왔다.

많을 때는 1,000여명에 이르기도 한 회원들은 계속하여 동지회의 경제활동, 출판활동, 사회복지활동에 참여하여 왔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와 희생은 오늘날 장학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지회는 1909년에 조직된 대한인국민회보다 12년 늦게 조직되었는데, 4,500여명이라는 적은 수의 이민자로 시작된 하와이의 한인사회에서 동지회의 활동은 국민회와 필적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두 단체가 합동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두 단체의 기관지인 『국민보』와 『태평양주보』가 합동으로 발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리고 이민 1세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 하와이 한인사회는 국민회, 『국민보』, 감리교회를 포괄하는 한 체제와 동지회, 『태평양주보』, 한인기독교회를 묶은 체제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이 두 체제를 한인사회의 분열이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한인사회라는 한 동전의 양면으로 조국의 독립과 새 국가 설립을 위한 활동을 펼치면서 하와이 사회에 기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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