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와이와 함께하는 `반세기 하와이 새 이민사 정리’ (1)

2018년 7월 본보 창간 45주년 특별기획으로 추진된 하와이 청소년 역사탐방단이 출발에 앞서 호놀룰루 국제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하와이 청소년들에게 차세대들에게 하와이 이민역사가 시작된 인천의 이민사박물관을 비롯한 역사 현장을 방문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인이민 118주년 특집 기획

1월13일은 미주 한인이민 역사를 기리는 ‘코리언 아메리칸데이’이다. 하와이에서는 초기 사탕수수농장 이민 후손들의 업적을 발굴하고 기리는 뜻깊은 행사를 개최해 왔다.

2021년, 한국일보 하와이와 하와이 이민역사연구소는 한인이민 118주년 그리고 본보 창간 49주년을 맞아 제3의 이민물결을 타고 하와이에 정착한 이민 1세들의 역사를 정리하고 발굴하는 작업의 본격 시작을 알리며 새 이민사 시리즈를 연재한다.

2017년 본보가 시작한 ‘나는 역사다’ 시리즈에 이어 2022년 본보 창간 50주년 기념책자 발간 준비를 위한 이민 1세들의 역사자료 모으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시작하는 이번 연재는 118년의 한인 이민역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미주한인 이민종가 하와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이민1세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새 이민역사만들기 주역으로서의 역할기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주>

이덕희 하와이 이민역사연구소장

코리안 바 사건

미국의 1965년 새 이민법은 인종 별로 이민자 수를 할당해 온 1952년 이민법을 수정하여 많은 수의 아시아인이 이민 올 수 있게 되었다.

새 이민법은 1968년 7월 1일부터 실행되었고, 1968년에 하와이에 온 한인 새 이민자는 91명이었다.

1969년에 284명, 1970년 596명, 1971년 568명, 1972년 868명, 1973년에 1,305명, 1974년 1,172명, 그리고 1975년에 새로 1,476명이 이민 왔다.

1950년 인구조사에 집계된 7,030명의 한인 중에는 한국 출생이 1,772명이었고, 1960년에는 1,124명만이 한국 출생 초기 이민자였다.

1970년 인구조사에 7,201명 한인 중 한국출생이 2,063명으로 집계되었고 계속되는 이민으로 1980년에 한인 인구는 약 1만2,000명, 1990년에는 약 2만4,000명으로 증가되었다. 새 이민은 1990년대에 정점에 달하였고, 2000년에 한인 인구는 약 2만,3,000명이었다.

하와이 한인 인구의 증가를 가져온 새 이민의 역사도 반 세기가 넘었다.

2010년 인구조사에 2만4,203명의 한인 인구가 집계되었는데, 2021년 여름에 발표될 2020년의 한인 인구는 몇 명일지 궁금하다.

참고로, 인구조사에 기입하는 민족, 종족은 응답자 자신이 지정하는 것이다.

즉 혼혈인 경우, 자신이 선택한 종족으로 집계된다.

새 이민들이 그 동안 어떤 직업을 가져왔는지 직업 종류와 분포가 통계로 보고된 것은 없다.

새 이민 초기에는 언어소통 문제로 전문직 보다는 하와이의 관광산업과 관계된 자영업 등에 종사하는 수가 많았다.

특히 여성들은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거나 점원으로 일하였고, 또한 음식점에서 부엌 일이나 서브 등을 하였다. 특히 한인 여성들이 운영하는 바도 많이 생겨났다.

<코리안 바 사건>

제3의 물결을 타고 온 1970년대 후반 하와이 한인 이민역사 가운데 분수령을 이룬 사건은 단연 ‘코리안 바’ 사건이다.

978년 8월 16일부터 8월 18일까지 스타 블루틴지는 “코리안 바”라는 제목으로 호스테스 바에 관련된 연재를 실었다.

호놀룰루에 이른바 코리안 바가 1950년도 부터 운영되었는데, 1971년에는 약 60개로, 1978년에는 150개로 증가되었다.

스타 블르틴의 연재는 이렇게 증가된 코리안 바에 따르는 사회 현상을 기사화 한 것이었다.

인구 비례로 볼 때 미주 본토의 큰 도시보다 호놀룰루에 바가 많다는 등, 바와 관련하여 주류 판매 면허증의 문제, 탈세 등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스타 블르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8. 15 광복절 바로 다음 날 부터 계속된 큰 글자의 “코리안 바” 기사에 한인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8월 말에 30여명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 모여 코리안 바를 없애자는 이른바 “정화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하였다. 어떻게 코리안 바를 없애겠다는 것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부끄러운 감정으로 행동하려고 한 것같다.

이 모임에 참석한 최영호 교수 (하와이대학교 역사학과)가 ‘코리안 바”라는 단어를 쓴 스타 블르틴에 항의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설득하여, 대신 “한인권리투쟁위원회”가 조직 되었다. 위원회 회장에 김하인 장군 (퇴역,육군)을 선정하였다.

최영호 교수와 이동진 목사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가 위원회의 대변인으로 세번에 걸쳐 스타 블르틴 경영진 대표들을 만나 민족 명칭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스타 블르틴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였다.

공개 사과가 없으면 10월 1일 스타 블르틴 건물 앞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드디어 1978년 9월 30일에 스타 블르틴은 사설에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생각이 짧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하였다.

또한 8.15 다음 날 부터 연재를 시작한 것에는 숨은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아울러 스타 블르틴은 모든 이민 민족의 인권을 평등하게 다루어 왔고, 더구나 하와이의 한인들의 독립활동을 격려하고 존경해 왔음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스타 블르틴은 의도치 않았던 잘못이라면서 사과하였다.

이 사설과 함께 김하인 장군의 이름으로 “한인사회 지도자의 성명서” 라는 장문의 성명문도 함께 실었다. 이 후 모든 뉴스 매체는 “코리안 바” 대신 “호스테스 바”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코리안 바” 사건이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