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턴 도서관 산책> 김재덕 저, 미출판 원고 ‘이수증분능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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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파견되어 하와이 대학교 해밀턴도서관에서 방문 사서로 근무하고 있는 김민재입니다. 주로 고문헌 및 희귀 도서들을 발굴하여 정리하고 있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것은 일제강점기 미출판 원고본 ‘이수중분능라도’ 입니다.

저희 도서관 서가에는 수많은 옛 한국 책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원고본도 그중 하나로, 아마 출판된 단행본으로 착각되어 서가에 꽂혔던 듯합니다. 저자가 직접 400페이지가량의 내용을 원고지에 작성하고, 빨간펜으로 퇴고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표지에는 제목 ‘이수중분능라도’를 수정하기 전, 원래 제목인 ‘사랑의 힘’이 적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김재덕으로 일제 시기 한양의 주요 서점이었던 신명서림의 사장으로 당시 많은 대중 소설을 집필한 작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은 백창인의 일본 고등학교 수험 이야기로 시작되며, 배경 시기는 1920년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이야기는 전반부에서 동경을, 후반부에서는 경성을 배경으로 전개되며, 극 중간에 주인공이 반전되는 애정 비극 소설입니다. 당시 동경의 지명과 일본어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백창인과 그의 아우 백영인이 당시 명문고였던 동경 제일고에 입학하려는 과정에서 구제고등학교 입학 절차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구제고등학교는 대학 예과(豫科)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일본 고등학교의 입시 시스템에 맞춘 예비학교에 다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처럼 보였던 백창인은 이야기 중반, 사랑의 실연에 아파하며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몸을 던져 사망합니다. 그 후 이야기는 그가 사랑했던 백정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한 여인을 둘러싼 두 남자의 죽음, 당시의 연애관,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관이 서사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반전이 있는 이러한 내용 구조는 당시 출판되던 딱지본(일제 강점기에 대중을 대상으로 출판된 소설책의 일종)의 전형적인 형태로 추정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간 조선 유학생들의 생활을 잘 보여주는 이 소설은 단순한 문학적 자료를 넘어,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미 출판된 소설의 원고가 발견되었다 해도 놀라운 일이지만, 미출판된 원고가 이곳 태평양 한가운데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신기한 일입니다. 이제야 그 존재를 드러낸, 그동안 읽히지 못했던 이야기가 언젠가는 세상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민재 / 해밀턴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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