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저, 문학과 지성사 출판, 1989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달콤한 사랑을 기념하는 날이죠. 하지만 사랑이 늘 달콤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달콤함을 위해 우리가 감내하여야 하는 질투, 기다림과 그리움, 상실과 같은 씁쓸함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사랑은 발렌타인 데이에 서로 주고 받는 초콜릿과 비슷한 맛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러한 모든 감정들을 담은 시집,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기형도 시인은 제게 있어서 젊음입니다. 그는 스물 여덟의 나이에 종로의 파고다 극장의 좌석에 앉은 채 사망하였습니다. 뇌졸중이었습니다. 그의 첫 시집인 이 책은 그의 유작이 되어 버렸지요. 스물 여덟의 영원한 젊음으로 멈춰버린 그의 시는 우리도 다 겪어봤던, 또는 겪고 있을 젊은 시절의 좌절, 절망, 우울함, 불안 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십대가 훨씬 지난 저에게도 이러한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요, 마치 녹아내린 초콜릿이 달콤함을 남기면서도 입안에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처럼, 그의 시어에는 잊히지 않는 그리움과 결핍이 깃들어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달에는 달콤함의 이면을 노래하는 기형도의 시를 읽어 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 중 하나인 ‘빈집’을 남겨봅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엘리 김 한국학 사서 (하와이 주립대 마노아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