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졸업식도 갖지 못하고 졸업한 아들이 어린시절 아버지는 어떻게 변호사직을 선택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필자는 될 수 있으면 한인과 다른 소수민족 학생들과 대학교 내에서 시간도 많이 보내고 한인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분석해 보라고 말했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변호사가 된 과정도 설명해 주었다.

필자는 시카고 레인텍크 매그넛 공립고교 재학 당시 공대나 의대를 갈 계획이었다.

이 학교는 시험을 통해 입학하는 학교로 미국에서 Ph. D. 박사학위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고등학교이다.

그러나 필자는 고교 3학년때 우연히 한인 이철수 케이스를 접하고 그의 억울한 사연에 울컥하며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이철수는 필자와 비슷한 어린 나이에 1964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필자는 1969년에 이민 왔다.

그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갱 두목을 죽였다는 억울하고 부당한 형사재판 결과로 유죄 판결을 받아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시절 미국 내 한인사회는 그 수는 비록 적었지만 한 마음이 되어 뭉쳐 아시안 단체들과 손을 잡고 이철수 케이스의 억울함을 대외에 알리며 그를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 결과 1982년 기금을 모아 이철수 케이스를 다시 재판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무죄를 입증해 이철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훗날 필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법대에 다닐 무렵 한인 단체 행사에서 우연히 이철수를 만날 기회가 있어 당신 때문에 내가 공대가 아닌 법대로 진로를 바꾸었다고 이야기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들에게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하며 이철수 케이스를 영화화 한 ‘True Believer’를 보라고 말했다.

필자가 변호사가 된 후 우리 한인들은 힘든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강력사건에는 크게 휘말리지 않아 형사법 분야와는 자연히 관계가 멀어졌다.

그 대신 주로 한인들이 많이 하는 비즈니스 상법을 많이 취급하게 되었고 소송을 한다고 해도 민사소송을 주로 다루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사반세기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필자의 법률사무소도 3명의 변호사로 시작해 이젠 12명의 전문 변호사와 3명의 법대 학생들이 함께하는 비교적 중견 규모의 법률회사가 되었다.

이철수 케이스처럼 하와이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한인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변호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그날까지 필자의 법대 진학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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