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놀룰루 길 이름’ (3) 와일더 애버뉴 Wilder Ave

이덕희
도시계획가/이민사 연구가

1월13일은 이민 105주년을 기념하는 코리언 아메리칸데이로 하와이에서는 하와이 한미재단(회장 김태영) 주최로 기념 만찬이 오후 5시30분부터 쉐라톤 와이키키호텔에서 열린다. 본보는 매년 1월 이민의 달을 맞아 하와이에서 환경계획가로 30년 활동한 후 지난 5년간은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고 있는 이덕희 한국학센터 연구원의 한인역사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올해는 한인 이민 105주년을 맞이하여, 이덕희 선생의 새로운 칼럼을 연재한다. 이 칼럼은 10여년 전에 호놀룰루의 길 이름의 뜻을 설명하여 발표했던 것에 한인 이민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충했다. 이를 통하여 하와이에 살고 있는 한인들뿐만 아니라, 한인 무비자 시대에 찾아 올 많은 관광객들이 호놀룰루를 조금 더 바르게, 재미있게 알게 되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3. 와일더 애버뉴
마키키 (Makiki)지역을 가로 지르는 와일더(Wilder) 애버뉴는 사무엘 와일더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1858년에 하와이에 도착해 선박회사 등을 설립한 기업가였다.와일더가 호놀룰루시 내무국장으로 지내던 1878년에 때 자신의 개인 회사인 목재상과 연결하는 직통전화를 가설하였다.이것이 하와이 최초의 전화였다. 바로 그 후 칼라카우아 (Kalakaua) 왕의 전화가 가설되었다. (물론 칼라카우아 애버뉴는 이 왕을 명명한 것이다. 조선왕국의 덕수궁에 전화가 가설되기 20년 전의 일이다.)와일더 에배뉴의 원래 이름은 “돌담 Stonewall” 이었는데, 1830년에 카아후마누 (Kaahumanu) 여왕의 명령에 따라 죄수들을 동원해 돌담을 쌓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다.후에 와일더의 회사 직원이 이름을 바꾸어 줄 것을 신청하여 와일더로 바뀌었다.하와이 왕국 때 돌담과 도로공사는 죄수들이 맡아하던 일이었는데, 부실 공사가 많아지면서 1856년부터는 죄수들을 쓰지 않았다.1920년대에 호놀룰루 시내에 240마일의 도로공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때에 차도와 보도경계에 사용된 돌 불럭은 대부분이 일본인 노동자들이 모일리일리(Moiliili) 채석장에서 채석한 것이다.한인 채석공들도 있었는데 사탕수수농장을 떠나서 가진 직업이다.옛 모일리일리 채석장에는 현재 하와이대학교 야구장과 체육관이 들어서 있다.와일더 애배뉴와 푸나호우(Punahou) 스트리트에 푸나호우 학교가 있다.푸나호우는 “새 샘물”이라는 뜻이며, 푸나호우 학교는 1841년에 태평양 지역의 조합교회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세워졌다. 조합교회 (Congregational Church, 현 United Church of Christ 교단)는 1819년에 하와이에 전파된 첫 개신교였다.20년 후인 1839년에 1만 5천명이 조합교회 교인이었는데, 이는 하와이 전체 인구 13만 명의 약 11%였다. 이 교인들을 위해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있었고, 이들 선교사들의 자녀 13명으로 학교가 시작되었다.현재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3,70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푸나호우 학교와 한인 이민자의 관계는 1905년경에 조병요 (전 하와이주 하원의원 재키 영의 외할아버지)가 학교 식당에서 접시닦이로 일한 것으로 시작되었다.첫 한인 남자 졸업생은 1929년의 유원식 (1952년과 1956년 미국 올림픽 선수단의 의사였던 리챠드 유 박사의 형)이고, 첫 여자 졸업생은 1932년의 정수영 (정남영 수의과 의사의 누이)이다.조병요는 38세인 1918년에 이올라니 학교 (Iolani School)를 졸업했다. 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도자로 활약하였다.당시 이올라니 학교는 다운타운의 칼레지 워크 (College Walk)에 있었다. 당시 칼리지는 고등학교를 지칭하였다.푸나호우 학교도 1859년부터 1934년까지 오아후 칼리지(Oahu College)로 알려졌다. 그래서 푸나호우 학교 뒷 편에 새 동네가 들어섰을 때 그 주택단지를 칼리지 힐스 (College Hills) 트랙이라로 불렀다.현 하와이대학 총장 관저를 칼레지 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집이 그 주택단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